[문화와 삶]수사와 말을 지우고 백자를 보다

박영택 |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2015. 6. 24.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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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운 말들이 횡행한다. 궤변과 억측과 요상한 말들이 정치판과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 텔레비전 켜기가 무섭고 신문 펼치기가 두렵다. 생각 없는 이들의 희한한 언변을 듣고 있노라면 말이 싫어지고 그 모든 입을 지우고 싶다. 하여간 나는 그 되지도 않은 말들이 너무 싫어서 말을 지운 그림과 사물 앞에 홀로 서 있다. 모든 색채를 지우고 화려한 장식과 문양을 최소화한 백자 앞에 직립했다.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열린 조선백자 전시를 이른 아침에 보았는데 전시실에는 나와 백자뿐이다. 차분함 속에 담긴 풍요로운 단색조의 생기 넘치는 깊은 맛을 즐기고 있었다. 저 백색을 무엇이라 호명하기는 어렵다. 이때 말과 문자는 궁핍해진다.

단순한 형태와 순백의 색감으로 인해 한국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논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백자다. 백자는 흰색 하나만으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데 이런 경지를 흔히 선경(禪境) 혹은 열반(涅槃)의 경지라고 한다. 또한 ‘관조’나 ‘고요’와 같은 키워드와 더불어 한국적인 미, 한국성에 관한 논의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어 온 것도 백자였다.

본래 백자는 조선시대에 사용된 실용적 차원의 물건이자 동시에 유교적 이념을 투여하는 상징적 매개이기도 했다. 그런 백자가 1930년대 조선의 전통으로 불려 나왔다. 야나기 무네요시를 비롯한 몇몇 일본인들의 심미감이 작동한 결과이다. 한국의 도자기는 한국인이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의 아름다움은 일본인의 안목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타자의 시선에 의해 백자는 조선의 의미 있는 미술품이자 전통이 된 것이다.

이른바 동양주의의 담론 속에서 김환기, 도상봉과 같은 작가들이 백자를 즐겨 그렸으며 이후 70년대에는 몇몇 작가들이 백자의 백색을 원용한 단색의 추상화를 그렸다. 오늘날도 여전히 백자를 소재로 한 다양한 작업들이 줄을 잇고 있으며 가장 대표적인 전통으로 호출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가장 조선적인 아름다움과 멋으로 이해되었다가 해방 이후에는 민족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전통적 가치를 지니는 고전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반면 그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표상이란 본질적으로 사물을 일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배제적인 성격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백자에 달라붙은 이데올로기적 표상과 강박적인 이미지를 지울 필요가 있다. 또한 현재 전통이라고 여기는 백자를 둘러싼 표상과 개념들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현재 우리에게 전달되었는지를 밝히는 것도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어떤 고정된 전통문화 원형론이나 본질론에서 벗어나서 ‘골동이 되어버린 옛것에 새것의 아우라를 뒤집어씌우는 그 원동력’이 과연 무엇인가를 질문해 보아야 한다.

이처럼 미술작품도 불필요한 말을 지워야 본질이 드러나는 법이다. 그간 백자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이나 과잉된 관념적인 수사는 백자와는 다소 무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서구 현대미술과 전통을 결합시켜 한국적 모더니즘을 만들고자 하는 의욕 아래 재단된 혐의도 있고 타자들의 시선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려는 욕망으로 인해 형성된 것이기도 했다. 한국미와 이의 현대화란 문제를 다분히 조선조 문인의 미적 취향, 백자 등으로만 제한시켜 소재주의화하거나 전통을 박제화하는 아쉬움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화여대 박물관이 마련한 이번 전시는 백자에 들러붙은 기존의 선입견이나 여러 수사를 지우고 오로지 백자 그 자체만을 차분히 감상하게 해준 전시다. 어떠한 수식도 없이 ‘조선백자’라는 타이틀을 내건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백자와 흰색에 기생한 이데올로기와 강박적 이미지를 모두 지운 자리에서 오직 저 순연한 순백으로, 혹은 형언하기 어려운 미묘한 백색의 변주 앞에, 기형의 오묘함 앞에 서게 한다. 모든 허황한 수사와 구차한 말들을 다 지우고 백자 자체의 매력을 고요히 음미하게 한다.

<박영택 |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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